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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6-28 12:27 조회3,12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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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1924년 제3대 동아일보 사장

1925년~1927년 동아일보 고문, 주필

1927년~1937년 제6대 동아일보 사장

1937년~1940년 동아일보 고문

1941년~1943년 동아일보사 대표 청산위원

1943년~1945년 동본사 사장

1945년 제8대 동아일보 사장

 

 

동아일보 (The Dong-A Ilbo , 東亞日報)

 

시대 근대
창작/발표시기1920년 4월 1일(창간)
성격 신문
유형 문헌
간행/발행 동아일보사
분야 언론·출판/언론·방송

요약 동아일보사에서 발행하는 종합 일간신문.

 

 

동아일보 창간호

종합일간신문. 1920년 4월 1일 김성수를 대표로 한 78명의 발기인에 의해 창간했다.

 

 

<발간 경위 및 변천>

 

1920년 4월 1일 김성수(金性洙)를 대표로 한 78명의 발기인에 의하여 창간되었다. 체재는 평판4면제(平版四面制)였다. 당시의 진용을 보면 사장에 박영효(朴泳孝), 편집감독에 유근(柳瑾)·양기탁(梁起鐸), 주간에 장덕수(張德秀), 편집국장에 이상협(李相協) 등이 활약하였다.

창간 당시부터 민족대변지라는 자각으로 출발하여, 창간사에서 ‘① 조선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자임(自任)하노라. ② 민주주의를 지지하노라. ③ 문화주의를 제창하노라.’라는 3개 주지(主旨)를 밝혔는데, 이는 지금까지 사시(社是)로 지속되고 있다. 그리하여 창간 당시부터 격렬한 항일필봉을 휘둘러서 일제의 주요 탄압대상이 되었다.

창간 2주 만인 4월 15일자 기사 ‘평양에서 만세소요’가 문제되어 발매반포 금지를 당한 것을 비롯하여 네 차례의 무기정간 처분과 수많은 발매반포 금지·압수·삭제 등 총독부의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네 번에 걸친 무기정간 처분 가운데 첫 번째는 일본 왕실의 상징인 3종신기(三種神器)를 비판하였다 해서 1920년 9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두 번째는 국제농민조합본부에서 보내온 3·1운동 6주년 기념축사를 번역하여 게재했다 해서 1926년 3월부터 4월까지, 세 번째는 한민족의 항쟁을 고무한 미국 언론인의 서한을 실었다 해서 1930년 4월부터 9월까지, 네 번째는 베를린올림픽 마라톤경기에서 우승한 손기정(孫基禎)의 유니폼에서 일장기(日章旗)를 삭제한 사진을 게재했다 해서 1936년 8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정간을 당하였다.

제1차 무기정간중인 1920년 11월에는 만주 혼춘(琿春)에 특파된 기자 장덕준(張德俊)이 일본군의 한교(韓僑) 대량학살사건을 취재하던 중 일본군에게 희생되어 우리나라 신문사상 최초의 순직기자가 되었다.

1924년에 들어서서 친일단체 간부들이 신문 사설에 불만을 품고 사장 송진우(宋鎭禹)와 취체역 김성수를 음식점으로 유인하여 권총협박을 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사회문제로 확대되어 언론집회압박 탄핵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그동안 신문 면수는 창간 때 4면이던 것이 1925년 8월 6면, 1929년 9월 8면, 1934년 9월 10면, 1936년 1월 12면으로 점차 증면되었다. 6면제 때 우리나라 최초의 조·석간제를 단행하였으나 곧 석간으로 복귀하였다가, 1932년 11월부터 조·석간제를 확립하여 고정시켰다.

발행 부수에 있어서도 1928년 총독부 경무국 조사에 따르면 『동아일보』 40,968부, 『매일신문』 23,946부, 『조선일보』 18,320부, 『중외일보』 15,460부로 『동아일보』가 단연 다른 신문들을 압도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동아일보』 제호 배면의 무궁화도안 삭제령 등 총독부의 압박은 더욱 강화되었고, 1940년에 들어서서 폐간을 종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그 해 8월 10일『조선일보』와 함께 총독부의 강압에 못 이겨 폐간의 비운을 맞았다.

1945년 12월 1일, 강제 폐간당한 지 5년 4개월 만에 중간(重刊)되었다. 체재는 타블로이드판 2면제로 발행되었다. 광복 이후 우후죽순처럼 쏟아져 나온 신문계에 전통 있는 신문의 출현은 방황하는 민중에 큰 기대를 안겨 주었고, 특히 우익민족진영에 큰 힘이 되었다.

1948년 10월 배대판(倍大版)을 내기 시작하였고, 6·25전쟁으로 인해 1950년 6월 27일 마지막 호외를 내고 휴간에 들어갔다. 9·28수복으로 10월 4일 복간하여 타블로이드 2면을 간행하다가 1951년 1·4후퇴로 다시 휴간하고, 1월 10일 임시수도 부산에서 복간하였다.

지방신문의 인쇄시설을 이용하여 타블로이드 2면을 겨우 발행하다가, 1952년 2월에야 부산 토성동에 임시사옥을 짓고 배대판 2면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피란 수도 부산에서부터 반독재의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의 미움을 받다가, 1955년 3월 15일자 신문에 대통령에 관한 기사 표제에 오식(誤植)이 있었다는 이유로 다섯 번째 무기정간처분을 받고 1개월 만에 해제되었다.

4·19혁명 이후 사회혼란의 와중에서 1960년 12월, 기사에 불만을 품은 박태선장로교(朴泰善長老敎) 신도 1,000여 명의 습격을 받는 불상사를 겪었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언론의 제약이 심해져 몇 차례의 필화사건을 겪었다. 5·16군사정변 이후 주 36면 석간으로 발행되다가, 1970년 3월부터 주 48면으로 증면되었다.

1974년 12월 하순부터는 ‘광고탄압’이라는 한국신문사상 전무후무한 사태에 직면하였다. 이듬해 2월, 8명의 임원을 퇴임시키고 일부 기구를 축소하여 난국을 타개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많은 일반 독자들이 광고란을 구입하여 소규모이지만 재정적인 지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 탄압은 1975년 7월에야 풀렸다.

1980년 11월 자매방송국 동아방송(DBS)이 한국방송공사(KBS)에 흡수·통합됨에 따라 폐국되었으며, 이듬해 1월부터 주 72면으로 증면하여 발행하였다. 1984년 4월 2일 새 활자(자체 면적 31% 확대)를 채택하였으며, 기본 체제도 17단에서 15단으로 개선하였다. 1992년 7월에는 최첨단 인쇄시스템을 가동하였고, 1993년 4월 1일부터 조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2009년 현재 주 296면을 발행하고 있으며, 자매지로는 『스포츠동아』·『어린이동아』·『주간동아』·『신동아(新東亞)』(월간)·『여성동아』(월간)·『과학동아』(월간)·『동아비즈니스리뷰』(격주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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