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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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6-28 12:30 조회3,145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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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4월 당시 동아일보 사장 :
동아일보에 인도의 시성이자 노벨상 수상자인 타고르의 특별기고 “조선은 아시아의 빛나는 등불”이라는 시를 받아 게재하여 3‧1운동 10주년 기리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Rabindranath Tagore)
출생 | 1861. 5. 7, 인도 캘커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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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1. 8. 7, 캘커타 |
국적 | 인도 |
요약 시인. 인도 문학의 정수를 서양에 소개하고 서양 문학의 정수를 인도에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1913년 〈기탄잘리〉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그는 〈동아일보〉 창간에 즈음하여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기고,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민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
191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인도 문학의 정수를 서양에 소개하고 서양 문학의 정수를 인도에 소개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는 위대한 성자 데벤드라나트 타고르의 아들로서 일찍이 시를 짓기 시작했다. 1880년대에 몇 권의 시집을 낸 뒤 시가집 〈아침의 노래〉(1883)로 그의 예술의 기초를 확립했다. 1890년에는 그의 성숙된 천재성을 보여주는 〈마나시 Mānasῑ〉라는 시모음집을 펴냈는데 〈마나시〉에는 형식에 있어서 오드를 비롯해서 벵골에서는 시도되지 않았던 시형을 지닌 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으며, 그의 대표적인 시들도 상당수 실려 있다.
이 시집에는 또한 그가 지은 최초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시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는 1891년 실라이다와 사이야드푸르에 있는 아버지 소유의 부동산을 관리하게 되었다. 그는 거기서 마을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고, 그들의 빈곤과 후진성에 대한 깊은 동정심은 나중에 그의 많은 저작들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1912년에 출간된 〈한 다발의 이야기들 Galpaguccha〉에는 그들의 '비참한 삶과 자그마한 불행들'에 대한 이야기가 모아졌다.
그는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에 대해서도 관심이 있었으나, 결코 인도의 독립을 지상의 목적으로 간주하지는 않았다. 그는 실라이다에서 벵골의 전원을 사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갠지스 강을 사랑하여 그의 문학의 중심 이미지로 삼게 되었다. 이곳에 머무는 여러 해 동안 그는 〈황금 조각배 Sonār Tari〉(1893)·〈경이 Citrā〉(1896)·〈늦은 추수 Caitāli〉(1896)·〈꿈 Kalpanā〉(1900)·〈찰나 Kṣaṇῑkā〉(1900)·〈희생 Naibedya〉(1901) 등의 작품집과 함께 〈Chitrāṇgadā〉(1892), 〈Chitra〉라는 제목으로 1913년에 재출간)와 〈정원사의 아내 Mālinῑ〉(1895)라는 서정적 희곡을 출간했다.
1902~07년 사이에 처자식과 사별한 그는 울적한 심경을 훌륭한 시로 형상화했다. 그는 1913년 널리 알려진 작품집 〈기탄잘리 Gῑtāñjali〉('찬송을 헌정함'이라는 뜻, 1910)의 영역본으로 노벨상을 받았다. 그는 1915년 영국으로부터 기사작위를 수여받았으나, 1919년 암리차르에서의 대학살에 대한 항거의 표시로 그 작위를 반납했다.
타고르는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도 수많은 작품을 썼다. 그는 생애의 후기 25년 동안 21권의 저작을 펴냈다. 그는 이 기간의 대부분을 유럽, 아메리카, 중국, 일본,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강연하는 일로 보냈다. 그의 작품들 상당수가 그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영역되었지만, 영역본들은 벵골어 원작에 비해 문학적 가치가 상당히 떨어진다.
그는 시와 단편소설 외에 주목할 만한 소설도 여러 편 썼는데, 〈고라 Gorā〉(1907~10, 영역 1924)는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다. 타고르는 1901년 볼푸르 근처 산티니케탄에 학교를 세우고 인도와 서양의 각 전통에서 최상의 것들을 선별해 조화시켜 가르치고자 했다. 그는 1921년 그곳에서 비스바바라티대학교를 세웠다. 한편 1920년 〈동아일보〉창간에 즈음하여 〈동방의 등불〉이라는 시를 기고하여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민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다.